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다노 카즈히토 (문단 편집) == 선수 생활 == [[릿쿄대학]] 시절에는 [[와세다대학]]의 [[와다 츠요시]]와 더불어 대학 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주목받았던 선수였다. 하지만 부상 전력과 더불어 후술할 스캔들이 문제가 되면서 드래프트에서 당초 입단이 유력시되었던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를 비롯해 어느 구단의 지명도 받지 못했다.[* 심지어 타다노를 추천한 요코하마의 스카우터는 짤렸다.] 그나마 그 재능을 안타까워했던 당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오 사다하루]] 감독이 지명을 고려했지만 윗선의 반대가 심해 결국 지명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타다노는 선수생활을 포기하지 않고 미국으로 건너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입단하고, 2004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50.1이닝을 던지면서 1승 1패 평균자책점 4.65의 성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 1승이 처음이자 마지막 메이저리그 1승이었고 2005년 이후 다시 마이너리그로 내려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로 트레이드 되지만 다시 메이저리그 진입에는 실패하고 일본으로 돌아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 드래프트 1라운드로 입단해 선발과 불펜을 오가면서 뛰게 된다.[* 말이 1라운드지 대학생, 사회인과 고졸을 따로 뽑던 시기였고, 이 해의 고졸 1라운더는 '''[[나카타 쇼]]'''였기 때문에 타다노는 최고 코어픽은 아녔다. 거기다가 애초에 대학생 사회인 드래프트에서도 닛폰햄은 처음에 타다노가 아니라 대졸 투수 최대어이자 헤이세이의 철완이라는 별명을 갖고있었던 투수 오바 쇼타를 뽑았고, 오바가 6구단 중복지명이라 소프트뱅크에게 빼앗기게 되면서 두번째로는 일본 사회인야구 최고의 좌완투수이자 전국대회 3경기에서 완투승을 거두었으며 [[도하 참사]] 당시 일본 야구대표팀 멤버 핫토리 야스타카라는 대졸사회인 좌완투수를 뽑았다. 근데 이 핫토리마저 롯데에게 빼앗기면서 3번째 하즈레로 타다노를 지명한 것. 여담으로 오바는 타다노랑 거의 똑같은 성적을 거두면서 실패, 핫토리는 원포인트로 딱 한 해 밥값하고 다른 해에는 1군에 거의 나오지도 못하면서 셋 중 가장 실패. 결국 셋 다 프로에선 빛을 발하지 못했다.][* 이 해 대졸사회인 드래프트가 가뭄인것도 있던게 당시 대졸 최대어 3인방이었던 오바 쇼타, 하세베 코헤이, 카토 미키노리 등이 프로에서 싹 다 망했다. 이때 대졸사회인 드래프트 1라운드로 6구단이 오바를, 5구단이 하세베를, 둘 다 안 뽑은 야쿠르트가 카토를 뽑했는데 오바>하세베>카토 순의 성적을 냈다. 이때 오바의 성적이 타다노랑 별 차이가 없었으니 다른 둘은... 그리고 첫 번째 하즈레에서 시노다 쥰페이와 핫토리 야스타카가 각각 3구단 중복지명을 받았는데, 이 둘도 폭망했다. 또 다른 하즈레인 시로니타 히로카즈와 코바야시 후토시, 야마우치 소마도 타다노보다 성적이 안좋았으며 3번째 하즈레였던 무라타 토오루, 히라노 마사미츠, 코바야시 켄지도 제대로 망했다. 신기한 것은 이 12명의 대졸사회인 드래프트 1라운더들이 전부 투수였다는 것. 그리고 닛폰햄에서 뛰고 있는 무라타 토오루를 제외하면 2020년 기준 전부 은퇴했다. 당시 대졸 선수들은 1985년생, 일반적인 테크를 탄 대졸사회인 선수들은 83년생인 것과 이들이 전부 1라운더라는 것을 생각하면 가늘고 길게 가지도 못한 셈. 그 무라타도 지명된 요미우리에서는 1군 기록 없이 빠르게 방출당했고 6년동안 마이너리그를 떠돌면서 메이저리그에 딱 1경기 출장했다가 31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닛폰햄에 입단하면서 사실상 늦깍이 중고신인으로 복귀한 것이다. 복귀해서도 6선발과 패전처리, 2군을 오가면서 타다노의 테크를 그대로 타고있고. 다만 하위픽에서는 미야니시 나오키, 쿠와바라 켄타로, 이토 요시히로 등의 중간계투들과 도루왕까지 차지했던 외야수 [[히지리사와 료]] 등 그럭저럭 성공한 선수들이 있었다.~~이토랑 히지리사와는 전성기가 빨리 끝났고 쿠와하라는 가늘고 길게 뛰다가 30대 다 지나서 뒤늦게 전성기가 온거라 꾸준히 잘한건 미야니시뿐이다~~] 2012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일본시리즈 경기에서 오심으로 퇴장당했다. 정확히는 타자인 카토 켄[*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이었던 포수. 17년 동안 프로 생활을 했지만 통산 200경기도 나오지 못한 만년 백업포수였다. 2016년 시즌 이후 은퇴.]의 헐리우드 액션.[* 동영상이 날아간 관계로 글로 설명하면, 당시 던진 공이 포수 미트에 맞고 튄 것을 타자가 마치 얼굴에 맞은 것처럼 연기하는 바람에 심판이 감쪽같이 속아서 [[몸에 맞는 공]]을 선언한 것.] 이 오심의 도움으로 요미우리가 다소 석연치 않게 일본시리즈를 우승했는데, 이 이후 센트럴리그 팀이 도대체 일본시리즈 우승을 못하고 있다. 2014년 10월 1일부로 닛폰햄에서 나오게 되었고, 2015년부터 [[독립리그]]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 팀 이시카와 밀리언 스타즈의 플레잉 코치로 뛰게 된다. 프로 입단이나 재기를 노리는 독립리그 선수들을 상대로 인생의 실패를 논하면서 자신도 큰 실패를 겪었지만 좌절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동영상이 일본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여러모로 강한 멘탈의 소유자. 그의 구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4M나 될 정도로 높이 던지는 [[이퓨스볼]]. [[https://youtu.be/pxAuFUPLENk|39km를 찍기도 했다.]] 스피드건에도 찍히지 않는 초 슬로우볼이라고 악명이 높다. 2014년에도 엄청난 높이의 이퓨스를 선보이며 [[http://bleacherreport.com/articles/2083352-japanese-pitcher-freezes-batter-and-umpire-with-20-foot-high-eephus-pitch?utm_source=facebook.com&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programming-national|해외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2018년 3월 1일 이시카와를 퇴단하며 공식으로 은퇴식을 가졌고, 친정 닛폰햄에 전력분석원으로 합류해 프런트로 일하고 있다. 2022년부터는 2군 투수코치에 임명되어 본격적인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으나, 2023년 재계약을 하지 못하고 팀을 떠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